때로는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분주한 도시의 소음,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낯선 풍경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숨을 쉬게 된다. 이번 여정은 그런 마음으로 떠난 굴업도, 그 섬이 품은 연평산과 덕물산에서의 하룻밤 이야기다.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인천연안여객 터미널. 5월 황금 연휴와 주말을 맞이하여 예상치 못한 주차 대란에 잠시 마음이 철렁했지만, 운 좋게 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축항대로 공영주차장에 무료 추차를 하고 출항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새로 장만한 헤기오르삭 배낭을 메고 선착장으로 향하는 15분 남짓한 시간은, 마치 오랜 친구와의 첫인사처럼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다. 배에 오르자마자 김영하 작가의 신간 수필을 펼쳤다. ‘인생은 선불제인가, 후불제인가’라는 작가의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을 무렵, 배는 굴업도에 닿았다.

많은 이들이 개머리 언덕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연평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목거미 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의 풍경이 더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지난 백패킹처럼, 이번에도 무언가의 경계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나만의 작은 공간을 꾸렸다. 해변을 따라 걷다 문득, 인생은 어쩌면 ‘종량제’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주중에 마음 쓰고 시간을 쏟은 만큼, 이 섬 위에서 그만큼의 자유와 고요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오늘만큼은 나 자신에게 인색하지 말자 다짐하며, ‘수고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연평산 초입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맥주 한 캔으로 목을 축인 뒤, 곧장 정상으로 향했다.

연평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개머리 언덕을 제외한 굴업도의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어 오를 가치가 충분한 산이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멀리 덕적도까지 아스라이 펼쳐져, 다음 여정에 대한 작은 소망을 품게 했다. 내가 머문 곳 외에도 연평산에는 두어 곳 더 박지가 있었는데, 특히 정상 근처의 작은 공간은 홀로 온 이에게 완벽한 자리가 될 듯했지만, 바람과 좁은 공간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할 듯 보였다.

하산 후, 망설임 없이 덕물산으로 향했다. 하루에 두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섬의 북쪽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덕물산 자락에는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왜 떠나야 했을까. 고즈넉이 서 있는 나무만이 그들의 애환을 기억하는 듯해, 가만히 다가가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작은 웅덩이 옆 동물 발자국은 이곳이 생명의 터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굳이 물맛을 보려 하지 않은 것은, 혹시 모를 사슴의 평온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덕물산에는 세 군데 정도 눈에 띄는 박지가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아담한 자리를 택하고 싶다. 한두 동 정도 텐트를 칠 수 있는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일품이었고, 무엇보다 다가올 일출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바로 옆 암봉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바람을 피해 편히 쉴 수 있는 아늑함도 매력적이었다. 꼿꼿이 서 있는 나무들은 이곳이 바람이 그리 심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덕물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수없이 마주친 소사나무들의 기묘한 아름다움에 눈길이 머물렀다. 부러지지 않으려 몸을 기울인 그 유연한 굴절이 오히려 단단한 생의 증거처럼 보였다.

소사나무가 바람에 순응했듯, 나 또한 저항 없이 일몰의 장엄한 연주에 마음을 맡겼다.

가장 아름다운 음 하나가 연주의 마지막에 남아 여운을 남기듯, 그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겼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것들은 모두 비싸다고 말하지만, 정작 가장 값진 것들은 대개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 붉은 노을, 끝없이 펼쳐진 해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이 소박한 시간까지도. 그것들은 우리가 삶에 지불하는 시간만큼만 허락되는 선물이며, 그 시간은 언젠가 반드시 복리가 되어 다음 삶의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 25.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