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연 KAIST 교수「돈 대신 혼을 쫓아라」
티맥스소프트 창업자, 야간 상고 출신으로 KAIST 교수 임용
정선구 기자 (joins.com)
2004/11/13
도대체 불행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고난의 끝은 없는 걸까. 프랑스 극작가 로망 롤랑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고 했는데…. 티맥스소프트의 창업주 박대연(49) 씨가 어린 시절 늘 가졌던 의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자신은 사환으로, 동생은 구두닦이로, 누나는 가정부로 돈벌이에 나섰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젖먹이 동생은 입양돼야 했다. 가난하고 불행한 그 어떤 가정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축복의 기회로 보느냐, 벗어날 수 없는 저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나 보다.
소년가장 박대연은 고난을 넘어 역경을 딛고, 국내 굴지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일궈냈다. 야간상고 출신이지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공학과 교수도 됐다. 바로 자신의 혼을 바치는 집념으로-.
가난, 고난, 역경…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1968년 그는 운수회사 전남화물의 사환으로 취직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버지는 암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고 5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월급은 3000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원래는 7남매였습니다. 그런데 먹을 쌀이 부족해 갓 돌을 지난 막내는 남의 집에 입양시켜야 했습니다.”
동생들은 그나마 초등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구두닦이로, 가정부로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동생들은 정상적인 입학 나이를 다섯 해나 지나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사환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광주 동성중 야간과 광주상고 야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아버지마저 숨을 거뒀다. 낮에는 사환, 밤에는 학생, 집에서는 소년가장이라는 삼중고의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에선 늘 수석이었다. 수석졸업이면 무시험으로 은행에 들어갈 수 있어서 고3 때인 75년 한일은행에 취직했다. 은행원 월급(초봉 7만원)과 빚으로 동생들을 대학에 보낼 수도 있었다.
부평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을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생겼다. 전산실 요원을 모집한다는 것. 적성 테스트를 받은 뒤 전산부로 배치됐다. 훗날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컴퓨터와의 첫 인연이었다. 은행 컴퓨터와 12년 6개월을 뒹굴었던 88년 7월 그는 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미국 유학이었다. 퇴직금으로 손에 쥔 돈은 1300만원. 이 돈을 밑천 삼아 그는 오리건대로 향했다.
“나는 목숨까지 걸었다”
“개학 전날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탈장이었죠. 그러나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학비를 병원비에 쓸 형편이 못됐습니다. 그날로 퇴원해 버렸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녀오면 온몸이 피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박대연 씨는 뒤늦게나마 배운다는 기쁨이 너무 커 아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때가 96년. 벌써 나이는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교수직을 얻기 위해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다. 나이도 많은 데다 지역 연고나 선, 후배도 없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덜컥 외국어대 제어계측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유학 시절의 올A 학점과 최우수 논문상 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시절 그는 회사를 하나 차렸는데, 그것이 나중에 대박을 터뜨린 티맥스소프트였다. KAIST 교수 모집 때는 언짢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가 “KAIST가 어떤 곳인 줄 아느냐”고 질문했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너무 당돌하게 응시한 것 아니냐는 말투였다.
수업과 사업을 한창 병행할 때인 98년 8월 국방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귀사가 개발한 미들웨어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이 다운되지 않고 원활히 잘 돌아가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개발에 성공한 순수 원천기술이며….” 그로부터 1년여 뒤 국방부 발표가 나왔다. 자신의 회사 제품이 1등으로 통과됐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그의 회사 제품은 삼성전자, 포스코 등 굴지의 대기업과 은행, 증권사, 정부 부처 등 각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고난과 역경으로 그는 자연스레 강해져 있었다. 남에게 공부는 짐이었지만 그에게는 재미였다. 사업을 할 때도 최고가 돼 보겠다는 욕심에다 혼까지 투자한 것이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혼을 바치지 않았으니까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좇지 말고 혼을 좇아라.’ 나라 일도 마찬가집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혼을 불어넣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
ps 어제 티맥스에 다니는 친구가 교수님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의 일화가 회사에서는 화재라면서.. 아무리 갑일지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훈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했다. 자신의 눈에 맞지 않으면 정말 한심해 보이기도 하시고 또한 충고를 해주신다고…
정말 엄격하게 살아오신거 같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정말 한번정도는 뵙고 이야기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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